![]() 북일 장고봉 돌방 / 사진제공=AU호남뉴스 |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고분의 돌방으로 전해진 내부 모습이다. 거친 돌을 여러 단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통로와 무덤방을 연결한 구조가 고대 매장시설의 깊은 공간감을 보여준다.
방산리 장고봉고분은 앞부분이 네모지고 뒷부분이 둥근 장고형, 즉 전방후원형 봉분을 갖춘 삼국시대 고분이다. 1986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으며, 발굴조사 결과 봉분 주변의 도랑인 주구를 포함한 전체 길이가 약 82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장고형 고분으로 확인됐다.
무덤의 핵심 시설은 원형 봉분 내부에 마련된 굴식돌방무덤이다. 사람이 드나드는 긴 널길과 시신을 안치한 널방으로 구성됐으며, 벽체 하단에는 큰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는 깬돌을 여러 단으로 쌓았다. 벽을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여 쌓고 천장에는 대형 덮개돌을 얹는 방식이 사용됐다.
학술조사 자료에는 널방의 길이가 약 4.6m, 너비가 2.1∼2.4m, 높이는 약 1.8∼1.9m로 기록돼 있다. 널방 벽에서는 붉은 안료를 칠한 흔적도 확인됐다. 무덤방 위쪽 전체를 회색 점토로 밀봉해 빗물과 지하수의 침투를 막은 구조는 국내 장고형 고분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축조기술이다.
발굴조사에서는 무덤방 입구를 폐쇄한 뒤 제사를 지낸 흔적과 함께 토기·철기류가 발견됐다. 일부 토기에서는 조기로 추정되는 생선뼈도 확인돼, 매장 이후 무덤 앞에서 음식물을 올리는 장송 의례가 진행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고분은 축조기법과 출토유물을 종합할 때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는 백제가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해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다.
장고봉고분의 외형과 돌방 일부에서는 일본 규슈지역 고분과 닮은 요소가 관찰된다. 그러나 특이한 널길 구조와 천장 아래의 대형 판석, 석실 상부를 점토로 완전히 감싼 방수시설, 영산강 유역의 토기 제작기술 등은 규슈 고분과 구별되는 지역적 특징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규슈계 석실을 그대로 옮겨온 무덤이라기보다 외래 기술을 받아들인 해남지역 세력이 토착적인 장례문화와 축조기술을 결합해 새롭게 만든 ‘창출형 석실’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장고봉고분을 단순히 ‘일본인이 만든 무덤’이나 ‘일본식 무덤’으로 규정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신중해야 한다. 고분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피장자의 출신이나 정치적 소속까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고봉고분은 오히려 당시 해남지역 세력이 백제·가야·왜를 잇는 서남해 해상교통망에 참여하면서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구성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다만 무덤이 오래전에 도굴돼 피장자를 직접 밝혀줄 인골과 핵심 부장품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은 연구의 한계다.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인지, 백제와 관계를 맺은 토착세력인지, 해상교류를 담당한 정치집단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장고봉고분 주변에는 독수리봉고분을 비롯해 용일리·방산리 일대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장고봉 한 기만이 아니라 북일면 일대의 성곽·취락·고분과 옛 해안선을 함께 조사해야 이 지역 고대세력의 실체를 보다 정확히 밝힐 수 있다.
1,500여 년 동안 흙 속에 닫혀 있던 장고봉의 돌방은 단순한 매장공간이 아니다. 고대 해남이 변방에 머물지 않고 서남해를 무대로 백제와 일본열도를 연결했던 해상교류의 요충지였음을 증언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해남뉴스 박충배 편집 및 논설위원 news@hbcnews.kr
2026.08.24 (월) 13: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