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 북일면 독수리봉 고분의 문화적 고증과 학술적 의미 해남뉴스 박충배 편집 및 논설위원 news@hbcnews.kr |
| 2026년 07월 24일(금) 21:54 |
![]() 북일 독수리봉 고분 / 사진제공=AI호남뉴스 |
핵심적으로 이 고분군은 4세기 무렵 해남 북일지역을 기반으로 해상교통로를 장악했던 마한계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평가된다. 다만 무덤 주인의 이름이나 소속 소국의 정확한 국명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신미국 왕의 무덤’처럼 특정 인물이나 나라와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된다.
1. 사진에서 확인되는 고분의 모습
사진에는 정상부의 낮은 봉분과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토층·석재시설이 보인다. 봉분 일부가 훼손되거나 낮아져 일반 산봉우리처럼 보이지만, 발굴조사에서는 고분 3기와 석곽묘 1기가 확인됐다.
특히 1호분은 원형 봉분으로, 규모가 장축 13.7m·단축 13.2m·최고 높이 약 2m에 이른다. 2호분은 장방형으로 장축 12m·단축 9.5m·최고 높이 2.1m다. 두 고분 모두 지하 또는 지상에 나무로 만든 관이나 곽을 설치한 목관·목곽계 무덤이다.
봉토 중간에는 작은 깬돌을 촘촘하게 깔았다. 이는 단순히 돌을 장식한 것이 아니라 경사진 정상부에서 흙이 밀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막으면서 봉분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축조기술로 해석된다. 한강·충청지역에서 확인되는 할석 활용 방식과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2023년 발굴조사 내용
2. 왜 ‘마한 수장층의 무덤’으로 보는가
2호분 중심무덤에서는 고리 달린 쇠칼과 철도끼 2점, 철낫, 유리구슬 등이 나왔다. 봉분 가장자리에서는 옹관묘 3기와 토기·철낫을 묻은 의례시설도 발견됐다.
이러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쇠칼은 단순한 생활도구를 넘어 무덤 주인의 무력과 권위를 상징했을 가능성이 있다.
철도끼와 철낫은 철기 생산·유통망과 농업 생산기반을 장악한 세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리구슬은 지역 내부에서 쉽게 생산하기 어려운 교역품이어서 광역 교류망의 존재를 보여준다.
중심무덤 주변의 옹관묘는 수장을 중심으로 한 혈연·신분질서가 형성됐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가야계 토기가 의례용으로 묻힌 사실은 남해안 해로를 통한 가야권과의 교류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독수리봉의 피장자는 단순한 마을 우두머리가 아니라, 생산력과 철기·교역망, 장례의례를 통제했던 마한계 재지 수장, 즉 그 지역에서 성장한 유력자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발굴 성과 보도
3. 산 정상에 무덤을 만든 이유
독수리봉 고분군은 해발 54~58m의 산 정상부와 가지능선에 자리한다. 절대고도는 높지 않지만 탐진만으로 들어오는 남해안 바닷길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입지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바닷길과 포구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데 유리하다. 둘째, 해상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수장층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셋째, 무덤을 공동체의 영역을 표시하는 기념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독수리봉 고분은 죽은 사람을 매장한 장소에 그치지 않고, “이 바다와 육지를 다스리는 집단이 누구인가”를 보여준 정치적·상징적 경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매장 방향이 곧바로 ‘피장자가 바다를 바라보도록 한 것’이라는 해석은 흥미로운 가설일 뿐, 확정된 사실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4. 해남 북일 고분문화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유적
독수리봉 고분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북일면에서 확인된 기존 대형 고분보다 시기가 이르기 때문이다.
북일면에는 5~6세기에 조성된 장고봉고분, 신월리고분, 용운고분, 밭섬고분 등 서로 다른 형태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특히 장고봉고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장고형 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독수리봉에서 이보다 앞선 4세기 수장묘가 확인되면서 다음과 같은 발전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됐다.
4세기 독수리봉의 마한계 수장묘 → 해상교역을 통한 지역세력 성장 → 5~6세기 다양한 대형 고분문화 출현
이는 북일면의 대형 고분들이 외부세력에 의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상교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토착집단의 정치·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5. 백제·가야·왜와의 관계를 해명할 자료
독수리봉 고분군에서는 마한의 전통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야계 토기, 한강·충청권과 비교되는 봉토 축조법, 인근의 다양한 5~6세기 고분은 이 지역이 여러 문화권과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대 해남이 변방에 고립돼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해남반도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며 영산강 유역·가야권·백제권·일본열도를 잇는 해상교통의 길목이었다.
그러나 외래계 유물이나 무덤양식이 발견됐다는 이유만으로 피장자를 곧바로 ‘가야인’, ‘백제인’ 또는 ‘왜인’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고대사회에서는 토착 수장층이 외부의 물품과 장례양식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독수리봉 고분은 어느 한 나라의 문화로 단순하게 분류하기보다, 마한계 토착세력이 여러 지역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성장한 해양 교류사회의 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종합 평가
해남 방산리 독수리봉 고분군은 다음과 같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북일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4세기 마한계 수장묘다.
철기와 유리구슬, 외래계 토기를 통해 해상교역망을 보여준다.
목관·목곽묘와 옹관 배장묘를 통해 당시 신분질서와 장례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4세기 마한 수장묘에서 5~6세기 대형 고분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연결한다.
해남이 고대 서남해안의 정치·교역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마한·백제·가야·왜 사이의 교류와 지역집단의 능동적인 문화 수용을 연구할 핵심 자료다.
결국 독수리봉 고분은 단순한 옛 무덤이 아니다. 바다를 통해 철과 토기, 사람과 기술이 오가던 4세기 해남의 정치적 성장과 국제적 교류를 증명하는 역사자료다. 향후 정식 발굴보고서, 토기의 형식분류, 금속성분 분석,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인근 토성·취락과의 비교조사가 축적돼야 무덤의 정확한 연대와 축조집단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밝힐 수 있다.
해남뉴스 박충배 편집 및 논설위원 news@hbcnews.kr